담화문에 대한 생각들
담화문에 대한 생각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2.01 18:2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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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요즈음 부쩍 담화 또는 담화문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였을 것이다. 그것이 붙어있던 곳이 학교의 게시판이였을까 파출소의 게시판이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먼지가 뽀얗게 묻어있는 정미소의 벽이였을까? 암튼 나는 담화문을 그런 저런 곳에서 보면서 자랐다. 하얀 모조지에 검은 붓글씨체로 쓴 것이었다. 아직도 이칸오두막이 더러더러 눈에 띌 때이다. 그 이칸오두막의 문종이로 딱 알맞았다.


우리 동네의 글자를 모르는 어떤 아저씨가 그 담화문을 떼어다 문에 붙였다가 파출소에 잡혀가서 혼줄이 난 일도 기억이 난다. 다행히 글자를 몰라서 한 일이 인정되어 훈방초치되었다. 당시에는 문종이도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 바로 이웃이었는데 그 문에 ‘대통령 박정희’라고 쓴 친필 휘호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 아저씨가 문종이 살 돈이 없으니 파출소에서는 떼겠다고 한 약속을 못 지켰던 것이다. 내가 안 뗐다고 지적하자(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나는 공부를 잘하고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착한 아이였다) 문종이 살 돈이 없다며 고발하지 말라고 고구마를 한 개 주었다. 딱 한 개. 지금이었으면 고구마를 하나쯤 더 달라고 흥정을 했을 테지만 그때는 배가 하도 고파서 그 한 개를 달게 먹고는 입을 닫은 기억도 새롭다.

그러고 보면 참 옛날 이야기네....... 어쩐지 슬프다. 그 당시 나는 교과서의 서두마다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기에 바빴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 ....저마다 타고난 소질을 개발하고....” 하다가 역시 끝에는 ‘대통령 박정희’ 라고 끝맺었다. 대통령 박정희로 끝맺는 게 참 많았던 것 같다. 한다하는 집안에 가보면 “하면 된다”라고 적힌 액자가 있고 맨 아래엔 여지없이 ‘대통령 박정희’라고 박혀 있었다. 한다하는 집안이 아니라도 몇 개 안 되는 가게들의 입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이면 그 액자가 붙어 있었다.

그 시절로부터 거의 오십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 대통령 박정희의 딸이 권좌에 앉았다. 대개의 경우 사람은 본대로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경상도 속담에 본 데가 있다거나 본 데가 없다는 말이 있다. 갓 시집온 새댁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본 데 없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말은 바로 배운 데가 없이 행실이 안 좋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래 담화의 뜻은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 보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아저씨의 고구마를 먹든 때엔 더러 더러 지금 아버지는 아니면 할아버지는 큰방에서 손님과 담화를 나누고 계시니 조용히 하라는 주의를 듣곤 했다. 담화를 나누다는 담소를 나눈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었는데 대통령 박정희가 뜬금없이 담화문을 발표하는 바람에 그 뜻마저 왜곡되어 공적인 사람이 자신의 뜻을 전하는 글로 되어버렸다.

이 정부가 담화를 발표할 때마다 국민의 목소리나 여론은 일절 언급이 없다. 교과서 국정화는 찬성하는 사람보다 반대하는 사람이 배가 넘는데도 오직 자기들이 추진하는 국정화만이 올바르다고 강변한다. 수십만 명이 모여서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목소리에는 귀를 막고 몇 사람이 성질 부린 것만 부각시켜 마치 폭력시위를 한 것처럼 오도리방정을 떤다. 정부가 하는 일에 꽥 소리하는 사람은 엄벌에 처하라고 명령하고 외국으로 팽 가버린다. 이게 지금 담화를 발표하는 공적인 사람들이다.

통치든 지배든 군림이든 제발 원칙대로, 법대로, 배운대로 행해주었으면 좋겠다. 민주주의의 말뜻 그대로 말이다. 국민이 주인이잖은가? 내가 그 뜻을 잘못 알았나?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맞습니다, 맞고요, 우리 국민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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