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실학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실학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2.15 18:3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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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박지원(1737-1805)은 서울 출생, 시호는 문도, 본관은 반남, 벼슬을 싫어하여 황해도 금천 산속에서 경제, 정치, 군사, 문학을 공부하고 후에 자연과학에 열중 지동설을 주장, 1780년 중국 청나라에 들어가 학자와 교류 식견을 넓혔다.


귀국후 소설 허생전, 열하일기, 호질, 양반전 등 저술하여 당시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양반계급의 부패를 비판하고 무인도에서 이상향을 묘사하는 등 노론파의 한 사람으로 선진적인 외국문화의 섭취를 주장하였으며 정약용과 함께 실학 연구에 힘을 썼다. 1792년에서 5년간 함양군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목민관으로 선정의 귀감을 보였을 뿐 아니라 평생 가슴에 품고있던 자신의 실학을 유서깊은 이 고장에서 실천에 옮겨 볼 수 있었으며 작품 활동에 있어서도 대표적인 저작의 대부분을 이때에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관아가 있는 옆에 땅을 확보하여 연못을 파고 아래위로 개울물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으니 은연중 물아일체의 흥취를 즐길 수 있었다. 못가에 집을 짓고 벽돌을 구하여 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의 집짓는 법을 본뜬 것이다.

건축물의 신축과 수리를 맡아 보던 종9품의 자리에서 실학정신을 구체화 할 수 있는 자리 현감으로 왔으니 실학을 깊이 연구할 수 있었다. 곡식의 알곡을 가리는 풍구, 논에 물을 대는 수차인 용골차, 용미차 그리고 물레방아 등 제작하여 사용토록 했다. 연암의 나이 55세에 요즘 5급 공무원 현감이 되었으니 야심많은 사람으로 성에차지 않았을 것이다. 안의의 이름난 곳에 정자를 짓고 천리밖에 있는 술 친구와 글 친구를 초대하였으니 문인의 행실이 이처럼 속되지 않고 참 어려운 일이다.

안의는 벗을 불러들여 즐길만한 아름다운 고장이다. 덕유산에서 뻗어내린 기백산, 백운산, 황석산이 안의 3동 계곡을 굽이굽이 아름답게 빚어놓고 있다. 안의 3동이란 용추계곡의 심진동, 농월정이 있는 화림동, 백제인들이 신라로 떠나는 사신을 송별했다는 수승대의 원악동을 일컫는다. 기운찬 계곡물과 기암괴석이 정자들과 어울러져 있어 어디든 좋다. 연암은 이 계곡에서 왕희지의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본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그 잔이 자기 앞에 이르기 전에 시를 짓는 놀이를 즐겼다.

“선친이 그리울 때 형의 얼굴을 보고 / 형이 그리울 때 제 얼굴을 / 냇가에 비쳐 본다” 연암 박지원의 시이다 연암이 5년의 임기를 채우고 떠날 때 안의사람들은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서신으로 만류했다. 연암이 자주 올랐을 광풍루 2층 누각이 있는 안의의 남천 물가에 옹기 종기 모여있는 선정비 속 연암의 것이없다. 1986년 안의초등학교 교정에 박지원 선생의 사적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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